고잉홈프로젝트 베토벤 전곡 시리즈 I.
December 6, 2023
노력, 열정, 애정…
내가 봤던 이런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뛰어 넘어 모두를 집어 삼키는 그 ‘무언가’만 보였다.
Going Home Project Beethoven Series 1 (2023)
was created in collaboration with
Starfield Library and Hankyung ARTE TV
was Sponsored by
Samsung Foundation of Culture, Shinsegae, NC Cultural Foundation, Samchully and W Shopping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베토벤"
프로그램북 제작을 시작하며 내가 받은 키워드는 딱 이것 뿐이었다.
묘하게도 마침 얼마 전, @uzasmine 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무에게나 나를 드러내고는 싶지 않아. 그런데 누군가는 나를 알아주면 좋겠어.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블로그에 가끔 글을 써. 언젠가는 '발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알려진 작곡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장, 그러다보니 전 세계 어디에서라도 어마어마한 양의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유명인. 그런데 어쩌면, 남들이 말하는 위대한 작곡가 같은 모습 말고,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한 명쯤은 이해해주길 바라면서. ㅡ 프로그램북 작업은 바로 이 가정에서부터 시작했다.
제일 중요한 파트가 될 프로그램 노트는 가상의 공감대 형성이 가능한 이 시대의 작곡가 분들께 의뢰했다. 특별히 무엇보다 '작곡가로서의 시선'을 글 속에 녹여달라고 했다. 두 선생님은 내 말을 찰떡 같이 알아 들으셔서, 각자의 스타일로 교향곡 1,2,3번을 재조립해주셨다.
좋은 글까지 받고 나니 이제는 정말 디자인만 남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더 잘 읽힐 수 있을까"였다. 베토벤에 대한 책들은 세상에 정말 많으니까. 공연 단 1회만을 위해 만들어지는 책자. 뭐든 짧게! 더 짧게!를 외치는 시대에 8천자가 넘는 글들을 어떤 그릇에 담아야 맛있어 보이나? 🍽️
많은 생각 끝에 이번에는 과감히 여백을 살리는 디자인을 해보자고 결정했다. 그래서 하나의 글을 몇 가지의 갈래로 구분하는 작업 먼저 시작했다. 나는 보통 서사를 최대한 끊지 않고 싣는 것을 선호해왔기 때문에 이렇게 모든 페이지를 하얀 도화지처럼 생각하고 툭. 툭. 아이템을 얹혀놓는 게 꽤나 큰 도전이었다. "여기를 진짜 이렇게 비워도 된다고?" <- 이 생각을 몇 천 번쯤 하며 ㅋㅋㅋ 레이아웃을 완성해보니 '이렇게 글이 띄어져 있어서 오히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딱 들었다. (#디자인 이란 게 이런 점에서 참 신기하다. 같은 글이라도 어디서 끊고 잇느냐에 따라 수십 번 읽는 나조차 배치를 바꿀 때마다 새롭게 읽힌다.)
텍스트 얹은 초안을 공유한 후 각 글의 내용마다 연계되는 자료를 @yeoleum 이 모두 찾아주었고, 성경이나 논문을 읽을 때마다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는 '주석'의 형태로 디자이닉하게 풀었다. @yeoleum 은 프로그램북에 싣기 위해 “1792년 발트슈타인 백작이 베토벤에게 부친 편지”와 “하이든” 삽화 무려 두 개를 사비를 주고 구매했는데, 이 그림은 곧 대형 사이즈로 인쇄 및 표구되어 우리집 어딘가에 걸릴 계획이라는데……
아무래도 내가 학부 때 영화를 전공해서 그런지? 영화 하나를 끝까지 보면 마지막 #엔딩크레딧 까지 확인하는, 별 거 아닌 습관이 있다.
크레딧을 보다 보면 실제로 이 영화에서 어떤 디테일까지 건드리고 싶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데다가, ’저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결과물을 위해 이렇게 고생했구나‘라는 작은 감동이 일어 영화가 개인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특히 실사 영화보다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크레딧을 볼 때 훨씬 큰 감동이 왔었다. 예컨대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던 휴-먼들이 이제서야 비로소 ’확‘ 다가오는 느낌이 있달까?
오케스트라 플레이어들을 소개하는 페이지는 사실 이름과 악기가 깔끔한 표에 가지런히 정렬만 되어 있어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 페이지를 상세하게 만들수록 관객들이 내가 크레딧을 보며 느꼈던 것 ㅡ 베토벤의 음악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색다른 경험 ㅡ 을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결국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누끼를 따기 시작…ㅎ…. 결국 7페이지를 할애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성격 진짜🥶;;;
이 페이지의 컨셉이 ’엔딩 크레딧‘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듯한 스타일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사진들을 굳이 일자로 정렬하지 않았고, 각 원본의 느낌을 그대로 이용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곡선이 보이는 듯 배치했다. 더불어 만드는 와중에 연주자들의 사인을 받으실 분들이 계시다면 이 페이지를 적극 활용해도 좋겠단 생각을 했는데, 말하지 않아도 실제로 이용하신 분이 생겼읍니다? (역시 1호 수령인으로 준비한 보람이 있ㄷㅏ @kimyej1 ✨)
공연을 실제로 만드는 사람이 디자인을 직접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큰 특권이다. 프로그램을 선택한 이유, 음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뿐 아니라 연주자들과 나눈 첫 이메일까지 모두 기억하는, 그래서 그 누구보다 이들의 다음 스텝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만드는 소소한 한 권. 음악보다 앞서지 않는 도우미가 되길 바랄 뿐이다.
✍️ 이 글은 언제나 나의 보잘 것 없는 디자인 인사이트를 너무 재미있어 해주는 @kimkmss, 그리고 특히 이 페이지를 보며 너무 좋아해준 @zipcode_home 을 위해 작성되었습니다.